국군포로, 전쟁·전후납북자 문제해결을 위한 제언
  이름 : 이미일 날짜 : 2012-12-24 17:22:23 조회 : 1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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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북한의 남한민간인 납치의 근원 및 현황
북한의 민간인 납치 범죄는 1960년대의 일본인 납치가 아닌 그보다 훨씬 앞선 1950년 6·25전쟁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전쟁 중 납치의 근원은 1946년 7월 31일자 북한의 김일성이 내린 “남조선에서 인테리들을 데려 올 데 대하여”라는 담화에서부터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재북 지식인들을 비롯한 수백만 명의 북한주민들은 북한정권의 사회주의 체제 확립을 위한 사유재산 몰수에 이어 종교인, 친일파, 지주 등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피하여 대거 남하하였다. 이에 인적자원의 부족을 우려한 김일성은 남한 내 지식인들을 데려 오라는 지시를 내렸다.

북한은 이와 같은 사전계획 하에 6·25남침 전쟁도발 직후 3개월 동안 집중적으로 남한 점령 전 지역에서 필요한 대상자를 선별하여 조직적으로 8만 이상의 남한민간인을 납치하여 북송하거나 전쟁 수행 인력으로 전선에 투입했다. 휴전회담에서 북한은 전쟁 중 강제로 납북해간 남한민간인이 없다며 한명도 송환하지 않았다. 그 후 북한정권은 자신들의 납치범죄에 대하여 국제사회로부터 아무런 제재나 불이익도 당하지 않았다. 민간인 납치에 자신이 생긴 북한정권은 필요에 따라 전쟁 후에도 남한민간인은 물론 일본을 비롯한 11개국의 외국민간인들까지 납치하였다. 전후에도 남한민간인 납치사건은 자주 발생하였다. 정부와 유엔군 대표는 당면한 현안인 전후납북자 문제로 북한과 정전회담을 갖고 송환을 강력히 요구하여 상당수의 전후납북자는 귀환하였지만 아직 490여명의 미귀환자가 남아 있다. 이와 같은 상황으로 전쟁납북자 송환문제는 정부의 관심에서 점차 멀어져 갔다.

2. 전쟁 시 납북은 북한의 전쟁범죄
6·25전쟁 납북피해는 전쟁 중 불가항력적으로 발생하는 일반적인 인명피해와는 그 양상이 다르다. 전쟁납북자 전체 96,013명에 대한 통계는 전쟁발발 직후 3개월간 88.2%가, 16세부터 35세까지의 청장년이 85%, 그리고 80.3%가 집 또는 집근처에서 납북되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직업별 통계를 볼 때 대한민국 국정운영의 주체였던 공무원을 비롯한 지도급 인사와 지식인 및 친 대한민국 세력들이 납북 1순위였음을 알 수 있다. 소위 북한의 정치범으로 간주되는 이들 대상자들을 제거하지 않고 납북한 것은 인적자원이 심각하게 부족한 당시 상황 때문에 이들을 세뇌한 후 역이용할 속셈이었던 것으로 사료된다. 미국무부 문서는 정치범으로 납북된 남한민간인 수가 10,000명에서 적어도 20,000명에 달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신분의 민간인 외에도 전후 복구에 필요한 기술자들 역시 북한의 납북 대상이었다. 전쟁납북자 중 대다수가 청년들로 조직적으로 강제 모집되어 의용군 또는 노무자로 전선에 투입되거나 납북되었다. 이와 같은 납북피해의 실상은 북한이 남한을 적화하기 위하여 사전계획 하에 대상자를 선별하여 조직적으로 행한 전쟁범죄임을 확인할 수 있다.

3. 송환을 위한 노력
1)대북 적대정책 시(1950∼1999년)
(가)정부
건국직후에 6·25남침전쟁을 당한 우리 정부는 전쟁을 할 여력이 없어 미국을 비롯한 유엔군이 참전하여 전쟁을 주도적으로 수행하였다. 1951년 7월 휴전회담이 개시되자 한국 정부는 휴전회담 자체를 반대하는 입장이었고 휴전회담에서 발언권도 없어 유엔군측에 휴전회담에서 납북된 남한민간인 송환을 강력히 촉구하지 못하였다. 그래도 전쟁 전후 정부는 전쟁납북 피해사건을 국가적 인적 재난으로 인식하여 전국 납북자명단을 두 차례나 작성하였다. 또한 수 차례 “납치자 석방하라”는 성명을 발표했으며 초대가족회 대표를 포함한 외무부, 국방부, 내무부 등 정부관계부처 대표들이 모여 ‘피랍치인문제관계부처대표연석회의’를 주최하는 등 구출을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국회는 ‘납치민간인사송환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납북자 송환에 관한 건의문을 정부와 유엔군 대표에게 전달하였다. 그러나 휴전 후 반공이 국가 최우선 통치이념이 된 우리정부는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전쟁납북자 구출에는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나)유엔군
1951년 7월부터 시작된 휴전회담은 전쟁납북자 송환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러나 휴전을 위한 협상에서 북한 측의 전쟁납북자는 없다는 철저한 부인과 조속한 휴전협정을 원했던 유엔군 측 대표의 소극적 대응으로 완전 실패로 끝났다. 유엔군 측은 남한민간인 납북사실을 알고 휴전회담에서 제시할 명단까지 확보해 놓고도 ‘납북민간인’ 대신 ‘실향민간인’이라는 애매한 용어만을 사용함으로 북한의 납치 범죄를 묵인하였다. 북한 측은 휴전회담 초부터 남한에서 납치해간 외국 민간인들을 보호하고 있다면서 무조건 석방하겠다는 선심성 협상카드로 자신들의 도덕적 수준을 과시함으로 남한민간인 납북사실을 은폐했고 회담 내내 유엔군 측을 압도했다. 결과적으로 납북된 남한민간인은 한명도 돌아오지 못했고 외국 민간인 55명 중 사망자를 제외한 전원이 그들의 나라로 돌아갔다. 휴전회담 협상에서 북한은 자진 월남한 북한주민 50만을 유엔군이 납치(kidnap)해 갔다고 10회 이상 납치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과는 달리 유엔군은 단 한 번도 북한의 남한민간인 납치사실에 대하여 납치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다)대한적십자사
대한적십자사는 1956년 6월 15일부터 2개월간 납북자의 가족들로부터 7,034명의 안부탐지신고서를 받아 국제적십자사를 통하여 1957년 북한 조선적십자사로부터 337명에 대한 소식을 회신 받았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다는 소식까지 알려주었지만 당시 우리정부는 북한의 공작을 우려하여 가족들에게 생존사실만 알려 주고 일체 다른 소식을 가족한테 통보하지 않았다. 1960년 8월 27일 일간신문의 보도에 의하면 국제적십자사가 25개 단어 이내로 가족소식을 전하는 방식으로 납북자와의 서신교류를 우리정부에 제안했지만 결단을 유보하여 아무런 진척이 없었다.

(라)언론
1950년대 언론은 전쟁납북자 문제를 끊임없이 기사화했고 사회적 여론을 형성하는 데 앞장섰다. 가족회 산하 자료원에서 발간한 한국전쟁납북사건사료집 2권에 당시 보도된 중요기사들이 영인본으로 실려 있다. 1962년 동아일보사는 조철 씨의 납북인사 북한생활기를 56회에 걸쳐 연재했고 1964년 조선일보사는 대한적십자사와 공동으로 납북인사송환100만인서명운동을 전개하여 서명철을 유엔에 제출하는 것을 끝으로 언론의 관심도 식어갔다.

(마)납북관련 NGO
전쟁이 치열한 1950년 9.28서울 수복직후 임시 결성된 가족회는 납북된 가족을 구출하기 위하여 자체적으로 조사대를 평양에 급파하고 명단을 작성하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1951년 8월 피난지 부산에서 공식단체로 결성된 6·25사변피랍치인사가족회(이하 초대가족회)는 국회에 청원문을 제출하고 정부, 휴전회담 유엔군 대표, 국제적십자사 등에 납북된 가족의 송환을 눈물로 호소하는 등 적극적인 구출활동을 전개했다. 초대가족회는 납북자 송환을 이루지 못하고 휴전협정이 조인되자 1953년 8월에 첫 번째 구출대회를 서울 덕수궁에서 열고 송환을 촉구했다. 이어 휴전협정 후 실향민간인 귀향사업에서도 납북자 송환에 실패하게 되자 1954년 3월 서울 덕수궁에서 또 다시 구출대회를 개최하고 송환을 촉구하는 시가행진을 하는 등 전후에도 지속적인 송환 운동을 펼쳤다. 그러나 1950년대 후반부터 우리정부가 납북자 가족에게도 연좌제를 적용하기 시작하자 어디에도 기댈 곳 없는 초대가족회는 1960년에 들어서 활동을 중단하였다.

2) 대북 화해정책 시(2000∼2007)
(가)정부
2000년 당시 대북 화해정책을 수립한 김대중 정부는 대북협상에서 국군포로와 전시·전후납북자 문제를 남북화해에 걸림돌로 간주하여 공식적으로 언급하지 않았고 막대한 대북 경제지원에 대한 대가로 해결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전후납북자 단체가 결성되어 활동을 시작하자 우리정부는 480여명의 전후납북자만을 납북자로 인정했고 언론도 납북자가 480여명이라며 사실에 맞지 않는 숫자를 적시하여 보도했다.

대규모 대북경제지원에 대한 대가로 한다는 것이 2000년 7월부터 시작된 이산가족상봉행사였다. 자발적으로 헤어져 50년이 되도록 두고 온 가족의 소식조차 몰라 애간장을 태우는 연로한 수십만의 이산가족들을 상대로 연 2회 각각 100명 정도의 상봉이라는 이벤트성 눈물바다 행사를 벌여놓고 국내외에 매스컴을 통하여 대대적으로 남북화해의 시대가 도래한 것처럼 선전했다.

한국정부는 이산가족 상봉행사를 통하여 국군포로와 납북자 문제를 우회적으로 해결하겠다고 했다. 국군포로와 전후납북자를 4명 또는 8명을 할당하여 특수이산가족으로 이산가족 상봉행사에 포함시켜 가족들의 일회성 만남이 북한의 처분에 따라 제한적으로 성사되기는 하였다. 하지만 상봉 현장에서 당사자들은 자신들의 의지로 북한에 남았다고 말함으로 북한의 납치 억류가 아니라는 주장을 확인시켜주는 선전장이 되었다. 우리정부는 국군포로와 납북자도 이산가족상봉에서 가족을 만남으로 해결되고 있는 것처럼 주장하였다. 그러나 정부가 말하는 납북자는 항상 전후에 국한시켰다. 전쟁납북자는 특수이산가족 대상에서조차 제외되어 오다가 13∼15차 세 번에 걸쳐 16명이 포함되었는데 회신결과 사망 2명이었고 나머지 모두 확인 불가였다. 뜻밖에 14차 상봉 회신에 생존이 1명 있어서 조용히 상봉일 만을 기다리던 중 북한에서 착오가 있어서 잘못 회신했다고 연락이 와서 아무 대응도 하지 못하고 취소되었다. 사망으로 확인된 2명도 그 중 1명은 1957년에 국제적십자사를 통해 소식까지 받은 경우였고 1명만 새로 확인된 경우였다.

(나)납북관련 NGO
2000년 남북정상회담과 함께 수많은 전쟁납북자가 존재도 없이 사라질 위기에 놓인 현실에 연로한 전쟁납북자의 가족들이 40년 만에 초대가족회의 뒤를 이어 6·25전쟁납북자가족회(이하 가족회)를 결성하고 활동을 재개하였다. 경제적으로 피폐해진 북한에 경제지원에 대한 대가로 납북된 가족의 소식이라도 들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고 정부와 언론에 전쟁납북자의 존재를 알렸다. 그러나 당시 정부는 “명단도 없는데 납북을 어떻게 입증하느냐?”고 했고, 가족회는 “연좌제를 받았는데 정부에 명단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주장했지만 무시당하였다.

가족회는 전쟁 중 정부가 작성한 82,959명의 인적사항이 적힌 전국 『6·25사변피랍치자명부』를 직접 발굴하여 전쟁납북자의 명백한 존재를 입증하였지만 정부는 “신뢰할 수 없다, 전쟁 중 불가항력적 피해라 정부의 책임이 없다”며 또 다시 무시했다. 이러한 정부의 무관심에 가족회가 발굴한 5종의 전쟁납북자명부들을 종합하여 통계를 냄으로 북한의 전쟁 중 남한민간인 납치가 앞서 설명한 대로 전쟁범죄임을 밝혔다. 이 통계가 언론에 특종으로 보도되어도 우리 정부는 무반응이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북한이 처음으로 로동신문을 통해 전쟁납북자는 없고 날조라는 주장을 담은 “반공화국 모략소동”이라는 제하의 논평으로 공식 반응했다.

노무현 정부 들어 한반도의 평화협정에 대한 공식 언급이 있었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군사분계선을 걸어 올라가기도 했다. 미국의 지도층 인사가 이에 대해 긍정적인 언급을 했다. 이에 대하여 만일 한반도에 휴전체제를 끝내고 평화체제로 전환할 때가 되었다면 이제는 휴전회담에서 실패한 전쟁납북자 문제가 한반도 평화협정의 선결요건이 되어야 한다는 연설을 2007년 7월 26일 미국 워싱턴의 National Press Center에서 하였다. 그리고 미국 하원의원들을 방문하여 ‘납북자 결의안’을 미의회에 상정하는 것에 관한 협의를 하였다. 이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자 북한은 “인간쓰레기들의 서푼짜리 광대놀음”, “랍북자 결의안 미의회 상정 놀음은 정치적 도발”이라는 원색적인 반응을 우리민족끼리와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각각 보내왔다.

이어서 가족회 콰리 포럼에서 진행한 ‘휴전체제의 전환과 전시민간인 납북자 문제 연구’ 발표가 언론에 보도되자 북한의 로동신문은 “대결미치광이들의 불순한 날조품”이라는 논평을 또 한 번 내놓았다. 가족회 활동에 한국정부는 무시로 일관했지만 북한은 사사건건 날선 반응을 보내왔다. 이같은 반응은 6·25전쟁에서 북한이 저지른 민간인들에 대한 납치범죄가 얼마나 심각한 치부인지를 확인시켜 주는 것이고 또한 향후 반드시 청산되어야 할 뼈아픈 상처임을 일깨워 주는 것이다.

가족회는 서둘러 전쟁납북자의 남은 가족들로부터 증언을 영상 채록하여 총 127건의 증언채록문과 납북을 입증하는 국내외문서자료들과 휴전회담회의록 과거신문자료 등을 모아 각각 10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의 한국전쟁납북사건사료집 제1권과 제2권을 2006년과 2009년에 발간하였다. 1권은 전쟁납북사건의 사실성과 범죄성을 입증하는 자료들 중심으로 엮어졌다면 2권은 송환에 실패한 채 역사 속에 묻히게 되는 과정을 드러내는 자료들 중심으로 되어 있다. 문제해결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현재 전쟁납북자 명단 작성이 시급하게 요구되어 실태조사 등을 위한 특별법을 마련하기 위해 결성 후 계속 노력해왔고 현재 3번째 법안이 국회에 계류 중에 있다.

전후납북자 송환은 관련 NGO의 노력과 언론이 협력하여 정부의 소극적인 도움을 끌어내 이루어지곤 했다. 국군포로의 경우는 정부가 최우선적으로 책임지고 송환해야 할 대상이지만 역시 전후납북자와 유사한 방식으로 귀환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이들의 귀환은 특종으로 언론에 보도되었고 그 결과 정부가 이 문제해결에 관심을 갖도록 하는데 기여했다. 가장 먼저 1999년 국회에서 국군포로관련 특별법이 제정되었고 현재 귀환할 경우 정착금으로 4억에서 6억 원 정도가 지원되고 있다. 그리고 2007년 4월 전후납북자 특별법이 정부입법으로 제정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선의의 제도가 오히려 브로커의 돈벌이 수단이 되어 북한에 가족들이 있기 때문에 귀환을 원하지 않는 국군포로를 탈북하도록 유인하여 귀환시키는 부작용도 발생한다. 지금까지 국군포로의 탈북은 주로 민간단체의 주선으로 85명이 귀환하여 16명이 타계했고 현재 69명이 생존해 있다. 현 정부는 국군포로 당사자가 원하지 않는 탈북은 삼가줄 것을 민간단체에 주문하지만 여론을 방패삼아 정부가 하지도 못하면서 방해만 한다는 비난으로 맞선다. 귀환한 국군포로들은 북한에 두고 온 가족들 걱정에 마음 편할 날이 없다고 한다. 경제적 도움만 주면 북한에서 가족들과 여생을 보내는 것이 이들의 소박한 소망이다. 정부가 주도하지 않는 주먹구구식의 송환은 이들에게 또 다른 이산의 고통을 안겨주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4. 문제해결을 위한 제언
지금까지 정부, 휴전회담 유엔군 대표, 적십자사, 관련 NGO, 언론 등이 국군포로, 전쟁·전후 납북자 문제해결을 위해 노력한 내용과 문제점들을 살펴보았다. 그동안 문제해결이 미진한 것은 한 마디로 과거 우리정부가 직접 나서서 정직하게 문제를 드러내놓고 정치적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을 주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지금까지 그렇게 못한 과거 정부를 탓할 생각은 없다. 다만 아직 때가 되지 못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제는 기적처럼 대한민국이 부강해졌고, 북한정권은 붕괴가 예상되며, 그리고 무엇보다도 문제해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대한민국과 국민을 사랑하는 올바른 통치자도 세워졌다. 이 문제해결의 시작은 북한정권이 정직하게 사실을 시인하고, 민족 앞에 사과하며, 책임지고 바르게 해결하도록 하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정부가 나서서 관련 NGO, 시민사회, 언론 등이 협력하여 유해 및 생존자 송환, 소식탐지, 서신교환, 정례적 상봉 등 상황에 맞는 목표를 가지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사료된다.

문제해결의 궁극적 목표는 유해와 생존자를 송환하는 것이다. 유해송환의 경우는 북한에 남은 가족들과의 문제가 발생하지 않아 비교적 간단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생존한 경우, 당사자만을 송환하였을 때 오히려 가족과의 이산의 고통을 주게 된다. 생존자들은 이제 거의 다 80세 이상의 고령이다. 가족과 함께 송환할 수 있다면 가장 바람직하겠지만 불가능할 경우 경제적 도움을 주면서 남한의 가족과는 상봉할 수 있도록 제도를 마련하여 여생을 보내도록 하고, 원할 경우 사망 후에 유해를 송환하는 것도 피해당사자를 배려하는 하나의 방안이라고 여겨진다.

북한을 상대로 수많은 대상자들을 한 번에 다 성사시킬 수는 없다. 남한의 가족이 시급히 바라는 것은 우선 소식이라도 아는 것이다. 생사여부와 사망일자, 어디서 어떻게 살았는지, 북한에 남은 가족은 있는지 등이다. 생존한 경우 서신교환과 정례적 상봉을 할 수 있도록 하면 남한의 가족이 북한의 가족에게 경제적 도움을 줄 수도 있다고 본다.

납치 억류가 전문인 북한을 상대로 이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정부의 의지이다. 일본의 경우 정부가 직접 나서서 북한에 일본납치피해자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어떠한 경제적 지원도 고려하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전달함으로 상당부분을 해결하였다. 서독은 동독의 정치범들을 현금이 아닌 현물로 대가를 지불하고 데려오기도 했다. 한국의 국군포로, 전쟁·전후납북자 문제는 서독이나 일본의 경우와 다르지만 그 성공적 사례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며 다음과 같이 제언한다.

1)국군포로, 전쟁·전후납북자 전담기구의 설치
가능하다면 국가의 최고 통수권자인 대통령이 자국민 보호에 대한 강한 의지를 갖고 직속 전담기구를 설치한다. 구성원은 정부관계부처(국방부, 통일부, 외교통상부, 국정원, 행안부, 국가기록원, 국가보훈처, 보건복지부 등) 대표와 관련 단체 대표를 포함한 관련 분야(협상, 국제법, 범죄심리, 납치, 북한체제 및 경제, 한국현대사 등) 전문가 중에서 선임한다. 이 전담기구는 대북협상용 전쟁납북자명단을 확보한 후 관련자료를 수집하여 다양한 해결방안을 모색하고, 해결방안에 따라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한다. 실행 과정에서 생기는 문제점을 보완하는 등 납치문제 해결을 총괄한다.

2)국제적 연대 및 활동(국회, 정부 주무부서: 외교통상부, 관련 NGO)
국내적 노력만으로는 부족하므로 납치 문제에 관심 있는 국회의원들은 일본의 의원들과 연대해서 한일납치국회의원연맹을 결성하여, 이 문제해결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국가의 의원들에게 사실을 알리고 협조를 요청한다. 우리정부는 납치피해를 당한 일본 정부와 연대하여 미국을 비롯한 유엔, 한국전쟁 참전국과 북한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중국, 러시아 등을 상대로 외교 채널을 통해 북한의 납치문제를 국제적으로 알리고, 문제해결을 위한 활동을 전개한다. 한·일 정부는 북한의 핵문제를 다루는 6자회담에서 일본인과 한국인 납치피해 문제도 의제가 되도록 공동으로 노력한다. 한국 내 관련 NGO는 일본의 피랍일본인 관련 NGO와 연대하여 인권관련 국제 NGO들과 유엔, 미국 등에게 국제적으로 이 문제를 알리고, 또한 문제가 해결되도록 다양한 활동을 전개 한다.

3)평화협정을 위한 평화회담이 개최될 경우 국군포로, 전쟁납북자 문제 선 해 결 의제화(주무부서: 국방부, 외교통상부, 통일부)
또한 6·25전쟁 휴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하기 위한 평화회담 개최에 대비하여, 휴전회담에서 실패한 국군포로와 전쟁납북자 문제가 선 해결 의제가 되도록 철저한 준비를 해야 한다. 북한은 막무가내로 국군포로와 전쟁납북자가 없다고 주장해온 만큼, 이 주장을 반박할 확실한 명단과 관련 자료들이 최우선적으로 준비되어야 한다. 북한의 비핵화를 위한 6자회담 참가국이 6·25전쟁과 관련된 국가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6자회담에서 남북한 평화회담을 논할 가능성도 충분히 있어 이에 대해서도 준비해야 한다. 우선 이 6자회담에서 우리정부는 국군포로와 북한의 전쟁 중 남한민간인 납치문제를 알려 둘 필요가 있다. 외교 채널을 통해 유엔군으로 참전한 한국전쟁 참전국들과 유엔에도 국군포로와 전쟁납북자 문제를 알리고, 평화회담에서 선 해결 의제가 되도록 협조를 요청한다. 나아가,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중국과 북한의 남침을 허락했던 러시아에도 국군포로와 전쟁납북자 문제가 평화회담에서 선 해결 의제가 되도록 외교적으로 설득하는 노력을 기울인다. 또한 관련 NGO가 실패에 책임이 있는 휴전회담 대표국인 미국 의회에서, 휴전회담 협상 당시 유엔군 대표가 잘못 사용한 ‘실향민간인’을 ‘납북민간인’으로 수정하는 결의안을 내는 활동을 측면 지원하는 것이 필요하다.

4)대북협상에서 그랜드 바겐에 의한 대규모 현물 경제 지원에 대한 대가로 국 군포로 및 전쟁·전후납북자 문제의 총체적 해결(주무부서: 통일부, 국방부)
현재 북한의 상황으로 보면, 이 문제해결을 위한 대규모 현물 경제 지원이라는 협상카드가 가장 유력해 보인다. 북한은 지난 김대중, 노무현 두 정부의 무조건적인 대규모 경제지원이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후 상호주의 대북정책으로 거의 끊어지자, 남한에 지원을 요청하는 상황으로 가고 있다. 현 정부는 회담을 위한 회담이나 이벤트성 행사는 북한과 하지 않겠다는 의지도 확고하다. 지금까지, 현 정부의 대북정책은 매우 적절했다고 사료된다.

이 대통령이 2010년 신년사에서 6·25발발 60주년을 맞아, 처음으로 북한지역 내 국군전사자 유해를 발굴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만시지탄이지만, 그래도 정말 환영할 반가운 일이다.

전사자 외에, 이미 사망한 국군포로와 전쟁납북자의 유해 송환도 비교적 북한에 부담이 없는 가능한 해결방안이라고 생각한다. 바라기는, 전쟁 중 북한이 대한민국에 충성했다는 이유로 정치범으로 납치해간 후 희생된 2만 명에 달하는 공무원을 비롯한 애국인사들의 유해 송환도 함께 이루어졌으면 한다. 이분들은 대한민국 건국의 기초를 놓고 국정운영의 주체로 충성했지만 지난 우리정부의 상반된 대북정책으로 역사의 어둠에 유폐된 채 잊혀져 왔다. 오늘의 우리가 누리는 경제발전과 자유민주주의는 이분들의 희생위에 세워진 것이다. 6·25발발 60주년이 되는 해를 맞아 한시바삐 국가가 예를 갖춰 6·25전쟁납북인사를 대한민국 현대사의 제자리로 모시어 옴으로 건국을 완성하고 선진국으로서의 기본을 갖추기를 바란다.

먼저 대북협상에서 성과를 내려면 현 정부가 지금까지 해 온대로 북한과의 협상에서 원칙을 지키고, 성과에 조급해하지 말아야 한다. 피해가족들도 우리정부의 원칙에 의한 정직한 협상을 바란다. 국군포로와 전쟁·전후납북자 문제해결에 강한 의지를 가지고 대북 현물 경제지원에 앞서 이 문제에 대하여 북한이 정직하고 바르게 해결하도록 지속적으로 요구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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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전시 민간인 납치의 국제인도법적 고찰  제성호 2012-12-24 985
40  6·25전쟁 중 남한민간인 납북 문제에 대한 전후 처리 현황과  이미일 2012-12-21 1454
39  6·25전쟁 납북자 문제의 현안과 해결방안  오경섭 2012-12-21 1191
38  한국전쟁기 남한 민간인 인명피해 조사의 유형과 특징  정병준 2012-12-21 1062
37  6·25전쟁납북 진상규명의 법적 의미와 효과  제성호 2012-12-21 1040
36  국제법상의 강제실종 개념은 한국전쟁 중 북한에 의해 납북된  차지윤 2011-03-29 2641
35  휴전체제의 전환과 전시(戰時) 민간인 납북자  관리자 2009-02-06 2297
34  한국 납북피해자 인권의 현황과 과제  이미일 2008-10-31 2454
33  전시 납북 법조인 현황과 진상규명의 필요성  제성호 2008-07-30 2492
32  한국전쟁 납북사건을 보는 전체적인 눈  김미영 2008-07-30 2179
31  대한민국 건국과 6·25전쟁 중 납북의 성격  김광동 2008-07-30 2342
30  납북 언론인과 종교인의 비극  정진석 2008-07-30 2462
29  6ㆍ25전쟁과 납북자 문제  이미일 2006-03-13 2863
28  9.한국역사에 있어 전쟁피로자,피납자의 송환문제  김용욱 2005-09-26 2615
27  8.납북자실태와 해결방안  윤여상 2005-09-26 2731
26  7.한국전쟁시 북한의 남한  신인항 2005-09-26 2792
25  6.국군포로 및 납북자 송환문제 연구  서주석 2005-09-26 2696
24  5.국제협력을 통한 납북억류자 송환방안  변상정 2005-09-26 2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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