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출자증언기] 자비엔 마들렌
  이름 : 관리자 날짜 : 2011-03-16 16:35:28 조회 : 1412  
  파일 :
자비엣 마들렌

● 자료출처: 잡지 『호국』 中 「이달에 만난 사람」
● 지은이 / 펴낸이: 자비엣 마들렌 修女
● 발행일: 1985년

내가 겪은 6·25 그 현장(現場)

죽음의 행진(行進) 1천일 (II)
자비엣 마들렌 修女(당시 갈멜수녀원·故人)

다음은 가냘픈 여자의 몸으로 죽음의 행진과 죽음의 수용소 생활을 극복·생환한 「인간승리」의 기록이다. 이 체험적 수기는 지난 해 고인이 된 마들렌 수녀의 유고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편집자註>

북괴군이 서울을 점령한 지 20일이 지난 7월 14일 붉은 완장을 찬 공산군들이 갈멜수녀원으로 찾아와 “외국인 천주교 신자들은 내일(15일) 모두 주교관에 모여야 한다”고 선언을 하고 갔습니다. 15일 아침 지도부 신부인 공 신부 형제와 구 신부가 미사성제를 거행했어요. 마지막으로 모든 가족들이 모인 미사가 끝나자 공산군 장교들은 “빨리 빨리 갑세다” 소리치면서 재촉을 해요. 이때 한국 수녀들의 흑흑 흐느껴 우는 소리가 들렸어요. 원장 수녀는 돌아서서 크게 십자가를 그으면서 “항상 천주 안에서” 하는 말을 남겼지요. 이것이 사랑하는 갈멜과의 이별이었으며 3년간 죽음의 포로살이를 떠난 첫 걸음이었습니다.

그길로 소공동에 있는 삼화빌딩으로 끌려갔어요. 2층에서 국적, 나이, 한국에 온 년월일에 대하여 심문을 하더군요. 똑같은 질문을 50번이나 되풀이해요. 좀 있으니까 100명 가량의 한국인들이 잡혀와 방은 꽉 차 버렸어요. 이들은 밤새도록 몇 명씩 끌려나가고 이어 총소리가 나곤했어요. 이튿날이면 한국인들이 잡혀오고, 총소리가 나고 어디로 끌려가곤 하대요. 모두 죽인 것인지 어떤지 알 수가 없는 공포 분위기였어요. 16일 “이 할미야, 네가 조선 젊은애들을 다 망쳐 버렸어?” 하고 욕하며 한 사람 앞에 심문관 1명이 붙어서 하루 종일 심문을 계속했어요. 17일 아침 심문하던 자가 우리들 앞에 나타나더니 “신부, 수녀들은 모두 사형에 처한다” 하고 엄포를 놓았습니다. 저녁 때 또 잡혀온 한국인들 앞에서 인민재판을 열었어요. “일은 안 하고 게으르게 사는 이자들은 우리 민족을 위해서 아무것도 하는 것이 없고 다만 귀중한 물품을 저희 나라로 빼돌려 우리나라를 가난하게 할 뿐이니 살려둘 자격이 없소”라고 논고를 하대요. 그러자 한국인들 중 몇 사람이 “옳소, 죽여야 하오”라고 맞장구를 쳐요. 우리는 곧 총살당할 것으로 알았지요. 공 신부는 「임종 전대사」 내리고 모두들 최후를 기다렸어요. 밤새도록 총소리와 비명소리가 들렸지만 그냥 날이 샜지요. 18일에는 2층에서 갈멜 한국 수녀들을 잡아왔는지 자지러지는 듯 한 비명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어요. 어떤 수녀는 배반하고 어떤 수녀는 거절하는 소리가 엇갈리데요. 나중에 안 일이지만 한국 수녀들은 불려간 일조차 없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자들이 우리를 겁먹게 하려고 미리 꾸민 연극이었어요.

19일 서울역에서 기차의 화물 곳간에 탔어요. 우리의 화물 곳간에는 한국인이 가득 타고 있어서 발을 뻗을 수도 없었는데, 몇 명은 프랑스 말을 곧잘 하더군요. 공연히 말을 걸기도 하는 것으로 보아 그중 몇 명은 감시원이라 눈치챘지요. 그자들은 우리에게 공포심을 주려고 별의별 연극을 다 꾸몄어요. 기차를 갑자기 세우고 강도의 습격을 받았다는 둥… 우리가 조금도 놀라지 않자 그들은 어느 철교 위에서 기차를 세우고는 모두 총살한다고 서둘렀어요. 그래도 놀라지 않자 약이 오를 대로 올라 그들은 악의에 찬 진짜 연극을 했어요. 한 명의 남자 공산당원과 수녀 분장의 여자 한 명이 나와서 입에 담을 수 없는 추잡한 말들을 마구 한 다음, 가짜 수녀가 허원문(許願文)을 외자 “국가를 위해서는 허원도 무엇도 없다”고 전언, 남자가 공산주의를 굴복시키니까 동정을 깨뜨리고 마는 야비한 내용이었어요. 이때 한국말을 알기 때문에 사탄의 무리가 떠드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이 후회됐어요.
미군 포로와 같이 수용돼

이런 식의 사탄의 열차는 밤에만 3일을 달려 21일 평양에 닿았습니다. 이날 밤 10시쯤 트럭에 태우더니 한 시간쯤 방향도 모르게 달려요. 내려서 논길을 몇 킬로미터쯤 가다가 어느 조그마한 건물에 도착, 남녀로 나누어 수용하더군요. 여기에서 성공회 수녀원장 마리 글라라 수녀, 마렐 부인, 영국 기자 딘씨 등과 만났지요. 9월 5일 20분만 걸으면 압록강이 보이는 만포수용소로 옮겨졌어요. 이곳에 수용된 사람은 카톨릭 주교 2명, 신부 9명, 수녀 7명, 신자 7명 등 모두 25명이었고 정교회 10명, 성공회 2명, 감리교 5명, 유대교 2명, 마호멧 11명 등 모두 61명의 외국인 교인들이 모였어요. 국적별로는 프랑스, 영국,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스위스, 오스트리아, 독일, 터키 등이구요. 미군 포로도 750명이 있었지요. 피부병이 만연했고 날씨가 따뜻하면 남자들은 옷을 벗고 이를 사냥했고 또 미군들은 폐렴과 이질로 50여 명이 한꺼번에 죽어갔어요. 어쨌든 그래도 이곳에서는 굶기지는 않았고 모두 한 방에 모여 성가를 부르고 묵주 신공을 외기도 했어요. 10월 8일 다시 걸어서 고산진으로 옮겨졌어요. 이곳의 수용소는 한국의 오막살이집이었는데 문살과 창살 등이 없어요. 그래서 땅바닥의 가마니 한 장을 문에 치고 바람을 막았지요. 등불은 달빛이고, 이때까지만 해도 수용소 생활은 그런 대로 견딜 만했어요.

10월 하순쯤에 ‘호랑이’란 별명이 붙은 소장이 왔어요. 그는 대뜸 250킬로미터 걸어서 중강진까지 가야 한다고 명령합디다. 이때 수은주는 영하 30도 이하로 내려가 만주 벌판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이 살을 에는 것 같아요. 600여 리의 행진 코스는 백두산맥이 뻗어 내려오는 고산준령이에요. 여름에 잡혀온 우리들은 모두 얇은 여름옷을 입고 있었고 샌들을 신고 있는 등 맨발이나 다름없었지요. ‘호랑이’는 권총을 빼들고 “아무 말 말라. 군대 명령이다. 죽든지 걷든지 하나를 택하라”고 마구 몰아세워요. 그래서 우리 외국인 교도들과 미군 포로 700여 명은 수많은 희생자를 낸 ‘죽음의 행진’을 하게 된 거지요.

만포거리를 지나 어느 촌에 이르러 밤 10시에 옥수수밭에 머물렀어요. 옥수수는 다 베고 마른 잎사귀만 남아 있어 마침 이것이 고맙게도 우리의 이불과 요가 되어 주었어요. 옥수수 잎을 모아 불을 태워 덜덜 떨리는 몸을 다소 녹이기도 했죠. 이런 노숙을 하고 아침에 일어나 보니까 남자들의 수염에는 하얗게 고드름이 달렸고 미군 포로 중 10여 명이 얼어죽었어요. 11월 1일이었지요. ‘호랑이’는 “낙오자를 내지 말라. 병자와 시체까지도 가져가야 한다”고 소리칩디다. 미군 포로는 자꾸만 죽어갔어요. 다들 못 먹고 못 입고 기진맥진하였으므로 시체와 임종의 병자는 버리고 걸었습니다. “빨리 빨리” 총 끝으로 등을 쿡쿡 찌르며 짐승을 몰듯이 무자비한 행진을 계속됐습니다. 왜 이렇게 빨리 모는지 모르겠어요. 유엔군의 추격 때문인 것 같았어요. 이날 밤 촌락 어느 허청 아래서 옥수수밥을 조금 받아 먹고 묵었습니다. 다시 날이 새자 행진을 계속하는데 미군 포로들은 들고 가던 가마니를 버렸어요.



보행으로 중강진까지

가마니는 이불과 요로 쓰던 귀중한 것이었지만 너무 기운이 없기 때문이죠. 우리 수녀들도 지칠 대로 지쳐 5명이 대에 걸린 묵주를 떼어 모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밭고랑에 묻었습니다. 걸음을 걷는데 지치면 눈썹도 뽑아 버린다는 한국의 속담이 있지만 우리 수녀들은 묵주를 버린 것이에요. 공산군 소대장 1명이 행렬 뒤에서 기관총을 들고 따라오며 길바닥에 누워 숨이 끊어지지 않은 포로들을 한 방씩 쏘면 ‘호랑이’는 낭떠러지에 발로 걷어차 버리구요. 11월 4일 하루에 모두 18발의 총성이 났어요. 750명의 미군 포로 중 모두 100여 명이 이 산골에서 기진해서 죽거나 사살됐어요. 11월 3일엔 베아트릭스 원장 수녀님이 행진 도중 숨을 거두었습니다. 우리 신자 중 첫 번째 희생자였는데 뒤이어 사상자가 속출하기 시작했습니다. 죽음의 행진을 강행시키면서 공산 경비병들은 임종 상태에서 비틀거리는 사람을 사정없이 쏘아 죽였습니다. 18명의 미군 포로와 베아트릭스 원장 수녀가 죽은 다음 행진은 밤 늦게야 끝났어요.

‘호랑이’수용소장은 모두 포로들을 발뒤꿈치를 세워 꿇어앉히고 모자를 벗어 경의를 표하게 한 다음 강의(?)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내용은 자본주의 국가의 악행을 욕하는 것이었어요. 사람이 죽어가는 마당인데도요. 이날 우리 갈멜 수녀들과 바오로회 수녀들은 “거룩하신 천주의 모친이여 고민하는 우리를 도우소서. 불행한 당신 자녀들을 도우소서. 마지막 시간이 닥쳐온 우리를 위하여 빌으소서” 이렇게 기도했지요. 계속 4일밤을 산과 옥수수밭에서만 잤으니까요. 11월 3일 베아트릭스 원장 수녀에 이어 백계 러시아 부인(59)이 어디론지 없어졌어요. 발목이 퉁퉁 부은 채 행렬 뒤에 떨어졌었는데 보이질 않거든요. 물을 것도 없이 공산병들에게 즉결처분당한 거지요. 11월 4일 새벽에 눈이 내렸어요. 모두들 행여나 오늘 하루는 행진을 쉬지 않을까 하고 기대했지만 ‘호랑이’는 포로들의 이런 가련한 마음을 모르는 채 다시 강행군의 출발 신호를 했어요. 내리는 눈은 발목을 덮고도 계속 내렸어요. 산길은 더욱 미끄러워졌고 두만강 건너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사정없이 볼을 때렸어요. 숨은 차고 가빠졌습니다. 타는 듯이 목이 말라 가시덤불에 매달린 고드름을 따서 목을 축였지요. 이땐 누구도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어요. 죽음이란 아주 친한 친구의 방문처럼 기다려지는 것이었으니까요. 어떤 감시병은 “전쟁이 끝나 당신들이 본국에 돌아가거든 미군 포로들의 총살 사건은 말하지 말아주시오”라고 당부하기도 했어요.

11월 5일 새벽 1시까지 걸어서 중강진 읍내에 도착했어요. 막상 우리를 몰고 온 감시병들도 더는 어디로 끌고 갈는지 모르는 모양이에요. 두 시간쯤 중강진 읍내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더니 어떤 큰 학교에 수용하대요. 날이 새자 성공회 수녀 원장 마리 글라라 수녀님이 심장마비로 돌아가셨읍니다. 11월 8일부터는 매일 반 시간씩 운동장에 나오게 해서 체조를 시켰어요. 81세의 우 신부님은 임종 직전이어서 이 모임에 나오지 못했죠. 그러나 ‘호랑이’에게는 이유가 필요치 않았어요. 우 신부님을 데리고 나오라고 호령호령하므로 다른 신부들이 하는 수 없이 우 신부님을 가마니 위에 뉘어서 운동장 구석으로 모시고 나왔습니다. 이날도 섭씨 영하 30도였어요.



영하 30도 속에서 옥수수로 연명

우 신부님은 이런 고역을 3일 동안 견디고, 11일도 가마니에 들려서 운동장 구석에 나와 있다가 천주님 품으로 돌아가셨읍니다. 그는 “오! 주님 천주여 죽기 위해서는 얼마나 고통을 당하여야 합니까” 하고 크게 부르짖었습니다. 57년 동안의 수도 생활을 마치신 거죠. 11월 12일, 갈멜 수녀원 지도 신부이신 공 신부님의 차례가 왔습니다. 공 신부님은 어린 아이와 같은 조찰한 푸른 눈으로 주위를 한 번 둘러보셨습니다. 동생 신부님은 슬픔을 걷잡지 못하시고 눈물을 흘리며 “형님, 천주께로 가시게 되셨습니다. 천주께서는 형님을 받으려고 좋은 자리를 준비하고 계실 것입니다. 형님은 항상 천주님을 잘 섬기셨으니까요”라고 목메어 기도했어요. 공 신부님은 아무 고민도 없이 마지막 숨을 고요히 거두셨습니다. 동생 공 신부도 행진하는 동안 이질로 고생하셨는데 이튿날 갑자기 돌아가셨습니다. 공 신부님 형제는 76, 74의 터울로 같은 날 신부가 되셨고, 50주기 기념을 지낸지 며칠 만에 6·25를 만났고 하루 사이를 두고 천주께로 나란히 돌아가신 것이죠. 난로를 피우고 삶은 옥수수알을 조금 주었습니다. 미국 아가씨는 양재기에 얻은 냉수는 마시고 배급받은 멀건 배추국으로 세수를 했어요. 국은 맹물 같았으니까요.
11월 16일 또 이동 명령이 났어요. 병자들은 남아서 무엇이건 탈 것을 기다리기로 하고 아직 건강한(?) 사람만 먼저 걸어서 출발했어요. 갈멜 수녀원장 테레사 수녀님은 이때 몹시 피로해서 벨라데타 수녀의 팔에 안기다시피 해서 30리의 밤길을 걸었어요. 어느 곳인지 모를 곳에서 행렬은 멎고 하룻밤 수용소가 된 민가의 사람들을 내쫓았어요. 물론 감시병들이 하는 짓이지요. 보통 민가의 방 하나에 20명 가량이 들어가려니까 비좁기 짝이 없어서 우리들은 모두 앉을 자리도 얻기 어려웠지요. 우리들 뒤에 쳐져 있던 멕탈드 수녀님과 수련장님은 걸으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걸을 수가 없어서 미군 포로에 부축되어 걷는 것이 몹시 불쌍했던지 좀 인정 있는 감시병이 좁쌀 실은 달구지에 멕탈드 수녀님과 수련원장님을 태워주었어요. 몸은 얼어들고 절벽 같은 산길을 올라갔다 하고 흔들려 두 수녀님을 달구지에 잡아 매었지요. 이튿날까지 달구지의 흔들림에 따라 멕탈드 수녀님은 신음하다 그대로 천당의 영원한 평화 속으로 가셨지요. 11월 19일 테레사 원장 수녀께서는 옆구리가 아프기 시작하고 매우 피곤을 느끼며 열이 났어요. 의학 공부를 하신 신부님 한 분이 진찰하여 보고 아스피린 한 알 있으면 좋겠다고 했으나 그런 약을 구할 수가 있어야지요. 우리들이 입은 옷을 벗어 깔아드리고 덮어드리고 했어도 테레사 수녀님의 몸은 이미 굳어져 갔습니다. “원장 수녀님! 우리 말이 들리시면 우리 손을 잡으셔요” 하고 애타게 울부짖었지만 대답이 없었어요. 캄캄한 밤에 우리는 모두들 눈물을 흘렸습니다. 11월 25일에 교황 사절 방 주교께서 또 운명하셨어요.



희생된 신부 무려 19명

방 주교가 중태에 빠지자 감시병들은 인민 병원으로 옮기라고 명령했어요. 인민 병원이란 곳은 우리들이 시체실이라고 부르는 외딴 오두막집이에요. 침대도 간호원도 없는 차디찬 냉방입니다. 그래도 감시병들은 죽을 사람은 인민 병원에서 치료하다가 죽었다는 명분을 세우기 위한 것이었죠. 방 주교님은 사흘밤낮을 담요 한 장만 쓰고 냉방에서 신음하시다가 돌아가셨죠. 방 주교는 중강진의 남쪽 하창리 마을 어귀에 묻혔지요. 대전교구 빌토 신부님도 당뇨병과 기운이 지쳐 좁쌀 양재기를 밀어내며 “못 먹겠어. 나도 다른 사람처럼 가겠어” 하시더니 그 이튿날 1951년 1월 6일 임종하셨죠. 세월은 흘러도 자유는 오지 않았습니다. 빌토 신부님까지 ‘죽음의 행진’으로 희생된 신부, 수녀만 16명이 됩니다. 약 1년 후 그 후유증으로 또 세 분이 희생되어 모두 19명으로 늘어났습니다. 그들은 포로들을 매일 아침 영하 30~40도의 혹한에도 의무적으로 체조를 시켰어요. 그래도 우리들 성직자들은 짧은 시간에 끝났지만 미군 포로들은 “원.투. 트리” 하면서 1시간 이상 했지요. 여름옷에 먹는 것이 이 꼴이니 폐렴이 원인이 됐지요. 매일 아침 4, 5명씩 미군 포로들이 죽어갔어요. 터키 부인은 미군 포로들을 보고 “저 다리는 우리 여섯 살난 꼬마의 다리보다 가늘구나. 사람이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다니!” 하고 울었어요. 미군들은 멀건 수수죽을 모자에 받아먹었으며 의약의 혜택을 못 받아 6~7할 이상이 죽어갔습니다. 이런 포로 생활이 중강진에서 다시 만포로, 순창으로 전전하면서 1953년 4월 17일까지 만 2년 9개월간 계속됐어요. 그래도 1952년 8월부터 수용소 관리를 중공군이 맡고서는 약간 형편이 나아졌어요. 휴전 회담이 무르익자 공산군은 우리를 평양으로 불렀어요. 코트를 맞추어 주고 “그동안 인도적이며 후한 대접을 받아서 김일성 수상께 감사한다”는 서약서에 서명을 한 다음 모스크바를 경유, 각자의 조국으로 갔습니다. 1954년 1월 29일 전교지의 우리 교우들은 얼마나 좋고 사랑스러운지 밤에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번호 제목 이름 작성일 조회
6  [탈출자증언기] 기나긴 겨울  조선희(Crosbie, Philip) 2013-01-04 3349
5  [현대사실록] 압록강변의 겨울  이태호 著, 신경완 前 북한조국통일 2013-01-04 828
4  [탈출자증언기] 자비엔 마들렌  관리자 2011-03-16 1412
3  [탈출자증언기] 김용규  관리자 2011-03-16 2316
2  [탈출자증언기] 배상하  관리자 2011-03-16 1417
1  [탈출자증언기] 계광순  관리자 2011-03-16 1479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