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서신 - 제 1신 (2001년 캐나다에서 보내오신 6.25사변 전후 이야기)
  이름 : 하영남 날짜 : 2005-07-08 12:13:14 조회 : 63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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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이 안와 일어나 쓴다

1924. 5. 9 (음력)
나의 出生
1943. 4. 9
결혼 (20세) 아빠는 23세

1944. 3.
큰 딸 政子 (日本名 마사꼬) 45년 6월에 死亡

1945. 8.
8.15 해방 (그때 北支 山西省에 있었음)

1946. 6. 24
영화 出生 歸國시 英國 商船에서, 船長이 記念사까지 써주었으나 분실.

1948. 3. 20
영선 出生 (鐘路 4가 91번지 외가집에서)

1950. 2. 10
영남 出生 (서울 南倉洞 4-2 지하실에서)

1950. 6. 25
6.25 전쟁

1971. 2.
成南빌딩 建築함 (南倉洞 所在 )

1977. 4.
카나다로 移民

1984.
회갑. 토론토에서 (See photo!! below)

1986.
Wellesley 1204 apt로 이사

2001. 5월
현재까지 15年째 혼자 살고 있음.

처음 캐나다 이민와서 8년을 같이 살든 딸네집에서 따로 나오니 얼마나 좋은지 天國같이 느껴졌는데. 이제는 늙음과 외로움에 젖어. 그런 느낌도 있지만 (가끔씩) 여기서 영남이 하고 같이 살면 얼마나 좋으랴 하는 생각이 수시로 남. Seoul이나 미국 등 外出했다 돌아오면 내 집이 天國 이구나하는 생각이 듬.

처음 결혼해서 Seoul 敦岩洞 할머니 댁에서 新婚生活을 했는데 할아버지, 할머니 큰 고모, 문자 (딸 데리고 친정살이하던) 하효순, 하복동, 나, 아빠 8食口가 살았다.

결혼 전 나는 일본의 三大 會社인 三井物産에 취직해서 '타이피스트'으로 女社務員으로 일했는데 착실하게 잘한다고 滿 三年이 지나야 昇給했는데 나는 2년만에 승급해서 월급을 2培나 받었고 한국인의 사원으로 대우안해주는데 나는 특수직업이라 대우도 받았다. 내가 결혼한다니깐 사장이 너무 섭섭해 하면서 아직 일르다며 안 좋아해서 브라질 오빠의 형(성낙승)이 우리 회사에 와서 승낙을 받았음. 결혼후 政子안고 회사에 놀러간 적도 있고 그 회사는 지금 미국대사관 (을지로 입구)자리에 있었다.

43년 겨울에 나는 임신해서 배가 부른대 아빠는 형님 일이 마음에 안드는지 北支 종배네로 훌쩍감. 나는 四丁目 집으로 가서 44년 3월에 첫 딸을 낳고 44년 초겨울 아빠의 초청으로 낯선 북지를 혼자 어린 딸을 업고 신의주를 지나 滿州를 지나 中國 北京을 지나 (하룻밤 여관에서 자고) 太原을 지나 臨冷? 이라는 小都市 수돗물도 집안에 없는 곳으로 갔음. 며칠이 걸렸는지 기억이 안나는데 순전히 기차로만 갔는데 21세의 젊은 여인이 말로 못 알아듣는 "쏴알라" 거리는 "짱꼴레" 들 틈에 끼여가는 도중에 얼마나 무섭고 두려운지 떠날 때 四丁目 어머님이 싸준 찰 밥 변도를 (여러 개인데) 하나도 못 먹고 애를 꼭 업고 있으니 소변도 못 누겠고 그 고생은 말할 수 없는 것 숫재 굶고 갔다.

종배네와 같이 살다가 종배는 한국에 갔고 (전쟁이 심해지니) 우리가 그 집에서 살면서 전당포로 생업을 했고 8.15 해방과 함께 귀국했다.

해방후 태원이란 곳에서 귀국할 때까지 살았고 또 임신해서 귀국하는 큰 상선에서 영화를 출생했음. 기차에는 아들 나아야하고 배에서는 딸을 나야한다고 우리 河氏의 본관을 물으며 '河玲華' 라고 이름지어 주었다. 선장이 이름을 지어주면서 기념할 수 있는 것을 써주었는데 그 貴한 것을 그만 잃어 버렸다.

종로4가 집에서 한동안 머물다 인의동 큰 집 (가게집, 방아깐)을 내어주어 그리로 가서 방아깐을 운영했고 어찌 어찌 하다 남창동 집을 형님(큰아버지)이 주셔서 그리로 이사를 했지. 그때 그집에는 1층에 종배네가 살고 2층에 우리와 문자네가 살았다. 같이 그곳에서 방아깐을 또 개설했고 그러저럭 살다 6.25가 난 것.

6.25가 나자 시골로 일단 갔고 아빠가 방아깐 건물이 마음에 걸려 우리는 그곳에 두고 혼자 Seoul에 왔다가 붙들려 간 것. 기다려도 기다려도 안오는 아빠. 할 수 없이 어린 영남이를 들쳐업고 나 혼자 Seoul로 옴.

갈 데가 없어, 남창동 집은 불타 버리고 四街 빈 집에서 지냄.

6.25 動亂

나는 그때 27세 꽃다운 靑春. 너는 生後 4個月 (baby) 영화는 48개월 (4년) 영선이는 27개월 (2년 3개월) 모두가 어린이ㅡ.

"미아리"고개에서 銃소리가 나니깐 모두 Seoul 시민, 그쪽 사람들은 모두 이쪽으로. 避難을 오는데 우리는 어디로 가야하나 하고 우왕좌앙하고 했지만 나로서는 어린 것들 때문에 꼼짝할 수 없으니 그대로 집에 있었고 6.28 쯤 人民軍이 들어왔고 도저히 그대로 있을 수 없으니 대강 대강 짐을 싸고 영화는 아빠와 自轉車 타고 영선이는 업고 영남이는 계집애 (어린이 보는 애)가 업고 (나 혼자 애들은 돌볼 수 없고 우리집은 방아깐을 하니깐 아빠하고 같이 일하므로 영남이 보는 애(업어주는 애)를 두었다. 그렇게 시골집으로 갔음.

얼마 지내다 아빠가 서울 집이 궁금하다며 혼자 갔고 우리는 그냥 있고 할아버지가 Seoul 다녀오셨는데 아빠가 내무부에 붙들려가셨다고 하시며 오셨다. 나는 애들하고 갈 수 없는데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아빠가 붙들려 간 것은 형님(큰 아버지)의 일이고 (親日派) 로서 왜정 때 日本 軍人들에게 줄 찹쌀까루, 모찌, 모나까를 만들어 日本政府의 納品을 해서 나 결혼할 때 떵 떵거리고 잘 살았고 일본사람과의 關係가 많았고 그로 인해 남대문 집과 우리 집도 다 일본인에게 넘겨 얻은 것. 큰 아버지를 拉致할 것인데 대신 동생을 붙들고 형님데려오라는 것이었고 고문을 받고 어떤 집 목욕탕에 가두었는데 (소금물로 먹이고) 그때 창문을 뚫고 도망해 나왔음. 그곳이 인의동 큰 집 근처인지라 四街 어머님집으로 피신을 했고 그후 시골로 와서 있었으면 되는 것을 며칠후 남창동 집으로 왔다가 다시 拉致됨.

나중에 돌아오지 않으니 영남이만 업고 혼자 남창동집으로 옴.

아빠가 四街 집으로 갈 때는 우리 어머니, 아버지, 할머니, 낙윤, 영희, 응모도 가평 시골집으로 피난갔고 응모어머니가 그 집을 지키고 살았다. 9.28 때 폭격으로 오장동 친척집으로 갔다가 결국 사망했지만(응모동생 딸과)

나는 영남이와 남창동에서 살았고 그때 종배네도 같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다가 9.28 미국상륙 (인천)이 서울l로 행해지면서 인민군과 시가전이 벌어졌는데 나는 총이 "펭, 펭"하고 날아드는砲火속에서 집안의 살림살이를 집 밖으로 내놓느라 죽음 속에서 왔다 갔다 했다.

결국 그 집은 美軍의 '소의탄'으로 불타고, 총알 속에서 끄냈다 들어냈다 하던 물건들은 다 타 버렸다.

할 수없이 그다음 날 4가 집으로 갔고 빈 집이 무서워서 혼자 살 수 없어 동대문 경찰서의 근무하는 (전에 4가집 심부름꾼이 경찰이 된 사람) 사람 불러 저녁이면 왔고 그때 美 八軍이 대학병원 (원남동)에 있었는데 거기서 일하는 한국여인을 같이 동거하게 해주어 같이 살다가 피난갔던 어머니 가족이 오므로 나는 다시 우리 시골집으로 갔는데, 반가워하지도 않는 시골 집은 순전이 그때는 걸어서 다닐 때라 영남이 업고 발이 아프도록 가야 할머니 할아버지 싸늘한 눈초리는 나를 아프게 하고, . . 종배 엄마가 오면(딸이니) 버선 발로 마중하면서도 나만 가면 눈을 흘기고 안좋은 내색을 하는 그 모습. 나는 잊을 수가 없다.

더욱 가슴 아푼 것은 너의 할아버지 말씀. 문안에 들어서는 나를 흘깃 보면서 하는 말, "왜 여름네 힘들여서 지은 농사에 왜 와서 먹느냐 . . . ? 흥!" 기가 막힌 말. 지금 같으면 돌아서 나왔으리라 마는 그때만해도 어린 생각이고 애들이 둘이나 그곳에 있으니 나온다는 것은 생각 못했다. 平生 잊지 못할 그 말.

너의 할머니는 어떤지 아니ㅡ. 너의 큰 어머니가 '산삼취" 큰 아버지가 세 번 장가 간 것 또 시집온 것, 그때는 늦은 나이 23세의 시집을 왔는데

할머니 할아버지가 며느리를 안 좋아해서 첫 번째도 두번째도 큰 아버지하고는 아무 문제가 없는데 부모님 성화에 이혼하고, 결국은 부모님은 동거를 하면 안되겠다 싶어 세 번째 장가갈 때는 아예 부모님을 따로 살게 하고 결혼했단다.

내가 이 事實을 어떻게 알겠니 결혼후 살면서 들은 이야기다.

할머니 하는 말, "남들은 남편을 다락에다, 마루 밑에다 숨겨서 살려 놓았는데 넌 어쩌자고 서방을 죽였냐 ?

아들도 없고 쓸데없는 딸만 주렁주렁 매달고 사는 내 모습, 배불리 먹지 못하고 배고프면 장독대 가서 고추장 찍어먹고 물마시고.

큰 집의 식모애가 작은 어머니 (나) 불쌍하다고 몰래 밥풀때 꾹꾹 눌르며 주든 생각하면 기가 찬다. 눈물이 난다. 지금도 . . .

그냥 살 수가 없어 인천 시장에 가서 빨래비누, 생활 필수품을 사가지고 머리에 이고 너는 업고 시골동네 돌아다니며 행상을 했다. 어떤 집에서는 난리에 젊은 엄마 불쌍하다고 밥을 주어 얻어먹고 못 얻어 먹을 때는 배가 무척 고팠고 왜? 너는 젖먹는 애기라 엄마 젖을 먹으니 내가 잘 먹어야 하는데 못먹으니 늘 허기가 젖고.

어떤 때는 집에 돌아오는 길에 근처에 사는 친척분이 나 잘못얻어 먹은 것 알고 들어오라고 해서 밥을 주는데 한번은 밥을 세그릇 정도 (밥통에 있는 것)를 다 먹었다. 그래서 그때 너무 많이 먹어서 胃下垂가 된 것. 위가 아래로 늘어나는 것 그로 인해 오랫동안 위병을 앓은 것.

내가 아들만 있어도 이렇게 멸시 천대는 안받았으리라. 딸만 셋이나 되고 젊은 여인이 어찌 살까 싶어 학대를 한 것 같다.

딸을 네 번 나니깐 너의 아빠에게 새 장가들어 아들나야 한다고 성화. 그러나 아빠는 묵묵무답 그냥 지내다 떠나간 것.

어떤 때는 살 길이 막막해 女軍으로 들어갈까 ? 애들은 自己내 자식이니 버리기나 할까. 도저히 그냥 살 수가 없어 이궁리 저궁리 설마 기다려보면 무슨 소식이 있겠지 전쟁이 아주 끝나면 무슨 일이 있겠지 기다려 보는 수밖에ㅡ.

이런 기다림이 벌써 50年이 지났고. 51年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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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수 없이 그냥 지내는데 1.4 후퇴가 되었다.

1951년 1월 4일 이북에서 계속적으로 이남으로 피난을 내려온다. 中共軍이 오는데 젊은 여자는 모조리 잡아간다는 소문. 모두 모두 집을 비우고 南으로 南으로 피난을 감ㅡ. 나는 어떡하나ㅡ. 할 수 없이 Seoul 4가 어머님께로 가보니 당신들은 어디론가 떠나야겠다며 너는 아이들도 있고 하니 시댁에 가있어라 하시며 같이 가기를 원치 아니하시니 할 수 없이 돌아와 있는데.

큰집. 큰아버지는 큰 트럭을 가주고와 쌀 등 미싱까지 다 싣고 가며 나한테는 한 마디 말도 없이 떠나가 버린다. 그 트럭 한 모퉁이만 앉게 해주면 어디든지 가서 나대로 살아갈 수 있으련만 말 한 마디 "애들이 어리니 그냥 여기서 지내라든지" 그냥 훌쩍 떠나가는 그 沒人情한 行爲 그들이 떠나간 후 만일 아빠가 있었고 큰 아버지가 없었드라면 큰 집식구와 우리가 함께 피난을 갔을 것이다. 저렇게 몰인정한 남편은 아니였을 것이다.滿 7 年간 살다 간 사람이지만 그사람 性品은 알겠기에 그런 생각을 했다.

할 수 없이 곰곰 생각끝에 영화는 두고 영선이, 나, 영남이, 셋이나 피난을 가야겠고 도저히 여기서 는 있을 수가 없으니 왜냐하면 시골동네도 다 떠남. 노인만 집에 있고. ..

쌀 한 말하고 남편이 두고간 '오메가' 시계와 값나가는 나의 의류품을 골라 어린애 보는 애와 나는 영선이를 업고 애보는 애는 영남이를 업고 영화는 아직 걸을 수 없어 할 수 없이 그냥 두고 가기로 한 것. 할머니가 설마 손녀딸 구박하겠나 싶어 (부모없는 것을) 떠남. 가는 것을 보면 쫒아 나올 것 같기에 잠깐 동네 놀러 간 사이 눈물을 머금고 떠나옴.

시골 길을 나서니 피난민이 줄이어 내려오는데 方向없이도 그냥 따라가게 되더라. 어두워지면 남들 처럼 아무데고 따라들어가 마당에서 부엌에서 밥을 해먹고 추우니 어디고 쑤시고 들어가 밤을 새우고 이렇게 가고 가고 또 가고 충남 예산까지 가니 더 이상 갈 수가 없다. 발이 다 부르터 걸을 수가 없다.

할 수 없이 길에서 방황하는데 어떤 여인이 우리를 보고 가족이 없느냐고 묻기에 우리 뿐이라고 하니 그 여인 말이 자기네도 집 주인이 다 피난가고 적적하니 같이 있자고 해 따라가니 富者 집인데 식모와 그 여인과 집보는 남자만 있어 그곳에서 1주일 잘 쉬었다. 더 있을 수 없어 시영이네 (내 언니) 할머니 집으로 찾어감. 그집이 예산읍에서 가까운 오산리라는 동네. 물어 물어 찾아가니 벌써 언니네 식구는 와있었음. 시영, 성영, 형부, 언니. 거기서 겨울을 나고 봄의 인천 으로 왔고 시골집을 들어감.

그동안 그 禮山에서 살 때에 뒷 방에서 사는데 같은 방, 부엌에서 불을 때면 안방을 거쳐 우리 방으로 오는데 溫氣가 있을 리 없으니 冷氣만 가시는 방. 영선, 영남, 나, 셋이서 지냈는데 영남이를 업고온 기집애는 공주의 부모가 산다고 해 그리로 보냈고 5일에 한 번씩 예산 장이 서는데 그때 영남이 업고 영선이는 언니네 맡기고 새우젖 등 반찬거리 사다 살았고 내가 가주고 다닌 의류는 시골동네 다니면서 쌀 등 필요한 것으로 바꾸며, 오메가 시계도 팔아서 생활비로 쓰고.

예산까지 걸어 피난올 때 업고 걷는데 영선이는 뚱뚱한 애. 잠을 자니 축느러져 얼마나 무거운지 발을 부르터 곪았고 아픈 다리로 걸으면서 영선이를 죽어라 죽어라하며. 가지고 온 무거운 것들을 길에 논에 다 버리고, 고생고생하며 가면서 큰 집생각하면 이렇게 고생 안하게 그 트럭 한 모퉁이 좀 태워다주면 될 것을 하는 그 원망함이 가슴을 메아리 쳤다.

그 예산 집에 살면서 얼마나 영화 생각이 나는지 나만 살자고 딸자식을 버리고 오다니 다음에 아빠 만나 너만 살려고 갔느냐고 하면 어쩌나 (영화한테 무슨 일이 있을 까 해서) 하는 생각. 꿈속에서 영화를 보면 미칠 것 같고...

겨울을 지내고 Seoul로 모두 간다고 해 언니도 (영등포에 살았음) 집으로 간다고 해 나도 따라 나섰는데 예산서 가까운 浦口로 가서 배를 타고 갔음. 인천으로 왔는데 언니네는 영등포로 가고 나는 시골집 (양지편)으로 가야하는데 영선이가 어려서 잘 걷지 못하니 영남이는 내가 업고 가다가 쉬고 가다가 쉬고 어떤 사람들이 한 고개 한 고개 자전거를 태워주곤 했는데 고개 넘어 보이지 않으면 싣고 달아나면 어쩌나 조마조마 함이 나를 설레였고 고개를 넘어 보면 길에다 놓고 가곤 했다. 그러면 내 마음이 풀리고 이렇게 해서 겨우 겨우 가깝게 왔지만 날이 저물어 더 갈 수가 없어 어떤 집으로 가 사정하고 하룻밤을 지냈음.

날이 밝아 또 걸어가는데 영선이도 나도 배멀미 의지하고 영선이가 통 걷지를 못해 그 어린 것이 얼마를 걷겠니-. 또 어떤 사람이 불쌍해서 자전거로 실어다 놓으면 또 데려다 걷고, 이렇게 해서 겨우 집에 당도했는데 . . .

전날 밤의 집에서 자는데 영화가 있는 근처까지 왔는데 못가고 자니 아쉬움이 더 궁금하고 영화가 잘있나 無事한가 ㅡ. 그 생각으로 잠도 제대로 못자고.

시골 집이 가까워 올수록 영화생각에 심장이 뛰는데 멀찌 감치 에 있는 영화의 모습을 보니 얼마나 다행인가 싶어 반가움에 나는 설레이는데 영화는 잠잠하니 별 반응도 없고, "왜 나를 두고 혼자 갔어" 이 한 마디로 끝이다. 나 떠난 후 혼자 뒷켠에서 울었다고 하며. 그때의 영화모습. 5살의 어린이. 물감들인 깜장 치마의 노란 저고리 (할머니가 해입힌대로) 아빠도 없고 엄마도 없는 (전쟁터에 피난갔으니 죽고 살았을지 모르니) 고아같은 자녀이니 할머니가 거두었고 나는 영화를 보니 마음이 좀 안정이 되나 시집식구가 반가워하지 않으니 어쩌지 ...하는 꼴이고.

이렇게 다시 천대받는 세월이 시작되었고. 생각다 못해 서울가면 4가 어머니도 돌아와 계시겠다 싶어 나도 seoul로 가야겠다 하고 영남이만 업고 두 딸은 시골집에 놔두고 혼자 서울행. 그때는 한강을 시민이 못들어오게해 야미 차를 타고 들어왔고 어머니 집에서 살기 시작. 할 수 없이 영선이만 먼제 데려오고 영화는 나중에 데려왔는데. 영선이를 데려오는데 저녁 밤에 자다가도 배 아프다고 울고 울고 했는데 시골 길에 오다가 대변을 보는데 회충과 더불어 얼마나 많은 새끼들이 그 속에서 우글거리는지 그러니 밤이면 배 아프다고 아우성을 첬고 그럴 때 마다 할머니가 "아범잡아 먹으려는 그 울음이라고 얼마나 호통을 쳤는데 알고보니 아무것이나 마구 줏어먹고 회충이 생겼는데 그것을 모르고 애만 야단쳤고 seoul에 와서 회충약 사먹이니 많은 회충이 나왔고 그 후로는 배아픈 소리 안하고. 자식은 어미가 길러야지 떼어놓고 오니 그렇게 된 것. 생각할수록 어미가슴은 아펐고.

서울에 오니 남창동 집은 불탄자리고 할 수 없이 4가집에서 친정살이 시작. 무엇인가 해야겠기에 '타이피스트'자리를 찾아볼까 했지만 그때는 한국타이프. 신통치 않아 생각 끝에 露店商을 시작. 장사라고는 시골 피난 시절의 行商한 것 밖에는 없는데 도매시장도 모르고 동대문 시장으로 가서 양말, 화장품, 담배(양키시장)등 사다가 4가 집들어가는 길에 '자판'을 놓고 길에서 노점상을 했음. 여름은 좋으나 겨울에는 춥고 밥먹을 때는 어머니가 대신 봐 주시고 그럭저럭 장사를 곧잘해서 돈도 조금씩 모아지는데.

할 수 없이 내 집으로 가야겠다고 결정을 내리고 그때 영화는 芳山국민학교다녔고 모았든 돈은 남창동 집의 흩어진 벽돌을 주어모아 방 한칸을 지었다. 부엌도 없는 방 한칸. 당장 영화를 데려올 수 없어 영선, 영남, 나 셋이서 살기 시작. 영화는 일요일이면 나 보러 오고 계속 4가 집에 있고.

앞으로의 생활를 하기 위해 남대문 시장, 화장품노점을 5만환에 사서 장사 시작. 집에 가까우니 애들은 데리고 나갈 수 없어 그냥 집에 두고 나갔는데 애들 생각에 정신이 안정안되고 그래도 그때는 아이들 유혹하는 일은 없던 때라 모두 전쟁후 살기 어려운 때. 남의 애들 생각할 여지가 없던 때라. 둘이서 집안에서 잘 놀고 있더때라. 집이 허물어져 마당이 넓으니 그런대로고. 하지만 저녁때만 되면 애들 생각에 장사고 뭐고 일찍 들어가 애들을 찾고.

어떤 때는 영남이가 없어 찾다 찾다 못찾고 문 뒤에서 돌맹이 위에서 자는 것을 보고 얼마나 부둥켜 앉고 울었는지. 저녁 밥 해먹일 생각도 못하고 그냥 부둥켜 안고 울기만 했다. 졸음이 오는데 잘 때가 없으니 큰 돌맹이 위에서 잠이 든 모양. 방문을 잠그고 나가서 겨울에는 추워서 안되겠으니 아예 밖에 못나오게 문을 잠그고 밥상놓고 요강을 놓고 오곤 했다. 그렇게 나와 있으면 또 방 안에서 무슨 일이 (화재) 같은 것이 있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달음박질로 뛰어 들창으로 들여다 보고 가곤했지.

이렇게 나의 젊은 時節은 얼룩진 세월을 보냈고 이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전쟁으로 고통받는 시간을 보냈으리라. 아빠 생각을 할 겨를도 없고 하루 하루의 삶에 지쳐 허덕이며 살았고 그러다 남대문 시장이 불이 나서 물건만 겨우 꺼내는 난리를 치렀고.

할 수 없이 우리 집 남은 공간의 (金江商會 자리) 천막을 치고 식당을 차렸다. 우리 동네 입구에서 우동장사 (술도) 팔든 '복순'네 생각나니ㅡ. 그 엄마가 이쁘지ㅡ. 함흥냉면 집. 밑에 밑에ㅡ. 그 엄마한테 물어가며 우동, 빈대떡, 술, 이렇게 食母 女人하고 둘이서 시작을 했다.

이야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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