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완 전 북한정무원 부부장 공개(증언 납북인사 그때 그순간 1) 폭격피해 야간 북송 처지면 산속버려
  이름 : 관리자 날짜 : 2005-09-26 11:44:49 조회 : 1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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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북인사들의 피랍경위와 북한에서의 행적,그리고 병사 폭사 등 비국적 최후에 이르기까지의 상세한 증언이 남북인사들의 관리를 맡았던 전직 북한 고관 신경완씨(필명)로부터 나왔다. 조선일보는 언론인 이태호씨의 집필로 출간될 신씨의 증언내용을 긴급 입수,연재한다. <편집자주>

1950년 6월28일 인민군이 점령해버린 서울거리는 유령이 휩쓸고 간 자국처럼 음산했다. 여기에 호기로운 모습으로 나타난 북한 관계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과 군사위원회 합동 연석회의에 참석했던 남북요인들 모시기 공작 의 집행 실무책임자들인 김응기,이주상,방학세,김창주,김춘삼 등이 이었다.

이들은 김일성의 특별지시를 받고 7월4일 새벽 서울시 인민위원회(서울 시청건물) 2층에 자리잡은 노동당 중앙위원회 서울지도부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들은 당의 주요임무를 띠고 있었다.

이들에게 극비지령을 내린 노동당 군사위원회는 6월28일 남반부의 정치 경제 사회계 주요 인사들을 포섭하고 재교양하여 그들과 통일전선을 강화할데 대하여 라는 색다른 결정을 채택했다. 노동당 정치국과 군사위원회는 이러한 결정을 더욱 구체화하기 위해 그해 7월3일 합동연석 회의를 개최했다.

이 자리에는 최고사령관 김일성을 비롯해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김두봉,노동당중앙위원회 비서 허가이,전선사령관 김책,부수상 홍명희-최창익-주영하-박헌영,내무상 박일우,총참모장 강건,서울시 인민위원장 대리 이승엽,당정치위원 허헌,민족보위상 최용건 등이 참석했다.

북한의 실력자들이 모두 모인 이 회의에서 소련파인 허가이,연안파인 박일우,주영하,최창익 등은 "주요 인물들을 모조리 체포해서 정치적으로 활용가능한 일부만 제외하고 처단해버리자"는 강경론을 폈다. 그들은 "그런 사람들을 재교양 해봤자 근본적으로 달라질 바 없다"는 논거를 댔다.

그러나 김일성과 빨치산운동을 함께 했던 강건,김책,최용건 등은 "연행대상 인물가운데 김규식 등 여러사람은 지난 48년 4월 남북정치협상도 같이했고 이승만에 붙지도 않았으며 박해까지 받았다. 왜 처단해야 하나. 오히려 포섭해야 한다"면서 처단론에 반기를 들었다.

회의를 주재하던 김일성 허가이-박일우를 제지하면서 "모든 사람들을 구별하지 않고 한결같이 반동으로 취급하여 처벌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면서,"그보다는 포섭을 기본방침으로 정하고 구체적으로 분류하여,그 기준에 따라 취급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김일성의 지시에 따라 서울시 인민위원회에 도착한 김응기 일행은 모시기 공작 작전회의를 열고 공작그룹 지휘부는 정보국이 자리잡고 있는 건물의 3층에 둔다.

합동대 지휘부는 성남호텔(현 서울 광교부근)로 정한다.

당조직에서 협조인원을 보장받는 문제는 이주상이 책임지고,공작의 전반적 지휘는 방학세가 맡는다.

작전순서는 사전에 정보를 수집-확인해 소재를 파악한뒤 종합평가하고 이에따라 모시기,연행,자수 또는 체포 등 대상에 따라 구체적으로 결정한다고 결정했다.

이들은 작전을 개시하기에 앞서 다섯가지 기준을 세웠다. 첫째 부류는 남한에 있으면서 조국통일 민주주의 전선 을 결성해 북한정권 수립에 참여한 정당-단체에 속했던 인사들,둘째 부류는 남한의 행정부와 국회-정당-사회단체에 숨어 활동하던 북한의 프락치와 동조자들,셋째 부류는 48년 4월 남북정치 협상에 참여한 정당 단체 지도자와 개별인사들,넷째 부류는 자수 또는 자발적으로 협력해오는 사람들,다섯째 부류는 연행 또는 체포해야할 인사들이었다.

이튿날 아침 30개 공작조,수백명의 전문 정보요원과 그 협조자들,그리고 내무서원 등이 일제히 활동을 시작했다.

국회 프락치사건 관련자들인 김약수,노일환,이문원,박윤원,김옥주,강욱중,김병회,황윤호,최태규,신성균,배중혁,이 맑?등은 인민군들에 의해 형무소에서 갇혀 있다가 연락을 받고 자진해서 또는 권유에 따라 출두했다.

김익환,양재하,김장열,안호성,김효석,구덕환,김칠성,백상규,유기수,박철규 등 전현직 국회의원들은 동료들의 권유나 압력을 받고 출두했다.

그러나 많은 국회의원과 정당,사화단체 저명인사들이 강제연행됐다. 그들은 김규식 조소앙,조완구 김명준 유동열 최동오 윤기섭 오하영 원세훈 엄항섭 박열 등 임정요인들,안재홍 백관수 정광호 구중회 신석무 신상봉 김헌식 이강우 장연송 조종승 오정방 김용무 조헌영 명제세 김종원 설민호 김경배 김용하 이상경 이만근 박영래 박승일 방응모 박보염(여) 박승호(여) 정인보 이광수 최규동 등 국회의원과 정당 사회단체 명사들이었다.

이무렵 성남호텔은 남한측 요인들을 연행-체포하여 한데 모은뒤 심시하고 연금하는 일종의 수용소로 변했다. 심사 차례를 가디리고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초조-불안-공포에 휩싸여 안절부절 했다.

모시기 공작 실무자들은 각계 인사들을 심사를 마친뒤 성남호텔과 성북동,청파동의 안가에 집결시켜 놓고 회유한뒤 일단 집으로 돌려보내 감사할 사람과 일제시대에 친일행위를 저질렀거나 해방후의 행적으로 보아 악질반동분자 로 인정되는 사람들은 성북동의 비밀장소에 감금해 놓았다. 맨먼저 서울을 떠난 사람들은 첫째부류에 속한 참여파의 잔류인사들 가운데 자진출두해서 등록한 40여명으로 50년 7월20일쯤에 군트럭을 타고 평양으로 향했다. 2차로 떠난 사람들은 2,3,4부류에 속한 인사들중 40여명으로 7월말에,3차는 권유나 위협에 따라 출두한 사람들과 연행체포자중 일부로서 8월초에,4차는 정인보 이광수 백관수 명제세 최린 현상윤 김용하 등 소위 반동 으로 지목된 사람들로서 8월중순에 각각 평양으로 향했다.

그러나 김규식 조소앙 안재홍 등 연로한 사람들과 건강이 나쁜 사람들은 일단 서울에 그대로 머물게 됐다. 평양으로 끌려간 사람들은 곧 조국전선 에 등록한뒤 공산측이 지정해준대로 폭격의 위험이 적은 서평양의 고노골과 감흥동 감북동의 학교 등 공공건물과 여관 등에 나뉘어 투숙했다.

북한 당국자들은 이들에게 하루 8시간의 사상개조교육을 시켰다. 그들은 이른바 자서전 과 이력서 를 써내야 했다. 이들에게 김일성 대학과 인민경제대학(정치-경제 아카데미) 교수들이 정치경제학,철학,소련공산당사와 공산당 선언,레닌주의 의제 문제,해방투쟁사 등을 강의했다.

국군과 연합군이 9월15일 인천상륙작전을 단행하고 9월28일 서울을 수복하고 국군이 먼저 10월1일 38선을 돌파하여 물밀듯이 북진을 계속하자 북한 당국은 평양에 끌어다놓은 인사들을 후방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먼저 납북된 인사들은 세가지 경로로 이동했다.

첫째 부류는 참여파와 협상파-자진 출두자들 이었다. 이들은 10월8일쯤 군트럭으로 사인장 순천 개천 구장,묘향산 고개를 넘어 자강도 희천에 도착했다. 이들은 이어 전천을 거쳐 강계에 이르러 고사리 산골과 약수리 산골에 머무르다 만포의 별오동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둘째부류는 반동으로 지목된 최린 정인보 백관수 명제세 김용무 백상규 등 저명인사들 이었다.

서평양의 학교건물에 별도로 수용돼 심한 차별 대우를 받았던 이들은 10월9일 밤 걸어서 순안까지 간 다음 겨우 군 트럭을 얻어타고 평남 숙천을 거쳐 안주에 도착했다. 이들은 관계자들이 나눠준 누더기 솜옷을 입고 신의주 방면으로 출발,걸어서 평북 박천을 거쳐 태천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들은 연합군 낙하산 부대가 멀지않은 뒤쪽에서 진격해오므로 방향을 오른쪽으로 틀어 고산지대인 운산을 거쳐 험산중령으로 이뤄진 적유령 산맥을 타야했다. 이 과정에서 기진맥진한 국문학자 정인보는 인솔 관계자들이 버리고 떠나는 바람에 아사와 동사 직전에 이르렀다. 관계자들은 강계에 도착한 남북인사 일행이 강력히 항의하자 뒤늦게 사람을 보내 정인보 등을 찾아 초산부근의 민가병원에 입원시켰으나 기력을 회복하지 못하고 숨을 거두고 말았다.

중환자로 분류돼 둘째 부류에서 빠져 서평양에 남아있던 이광수 최규동 등은 10월18일 밤 평양이 함락되기직전 군인들에 의해 들것에 실린채 평양북쪽 용성부근에 이르렀을때 미군기의 공습을 받았다. 총알과 폭탄이 쏟아지는 가운데 이광수는 요행히 목숨을 건졌지만 최규동은 폭사했다. 이광수는 군인들에 의해 자강도 만포면 고개동 마루턱에서 지병인 폐결핵이 악화돼 숨졌다.

서울에 남았던 조소앙 김규식 등은 9월27일 밤 이주상 김춘삼 등 관계자들의 인솔로 지프와 군트럭에 나누어 타고 성북동을 출발,삼선교 종로 수색을 거쳐 일산 문산을 거쳐 임진강을 건너 9월28일 개성에 도착했다.

이들은 이날밤 9시 송악산에서 군트럭 2대에 나누어 타고 황해도 김천을 눈앞에 두고 있을때 두차례 미군기의 공습을 받았다. 그때마다 요인일행은 차에서 뛰어내려 엎드렸다.

차가 평산을 벗어나자마자 비행기떼들이 날아들어 이 지역을 불바다로 만들었다.

일행이 서흥까지 가는데도 여러차례 미군기가 공습을 해왔다.

일행이 9월28일 심야에 서흥을 막 벗어나려는 찰나 갑자기 비행기 4대가 날아들어 조명탄을 터뜨리고 폭탄과 기총을 퍼부어댔다. 차가 급히 멈추고 사람들은 저마다 뛰어내려 뛰었다. 앞차가 소이탄에 명중되어 불길에 휩싸였다.

비행기들은 기총사격을 계속했다. 사람들은 귀조차 먹었는지 비행기 소리 폭음 총소리는 물론 동료들의 비명조차 들리지 않았다.

이 순간에 방응모 김붕준 등 몇사람이 앞차에 명중한 직격탄으로 숨지고 여러 사람이 다쳤다.

관계자들은 남북인사들과 상위한뒤 사망자의 시신을 서흥군 인민위원회에 맡겨 장례를 치르도록 하고 곧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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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1991년 10월 2일 3면 기사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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