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납북인사 북한생활기 - 죽음의 세월 35회 1962. 5. 9
  이름 : 사무국 날짜 : 2006-12-15 16:18:00 조회 :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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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북인사 북한생활기 - 죽음의 歲月 35

이름 : 관리자 번호 : 66
게시일 : 2001/03/08 (목) AM 10:07:51 (수정 2001/03/08 (목) PM 05:22:55) 조회 : 23

1962년 5월 9일 동아일보에서


죽음의 歲月 35


납북인사 북한생활기


金義煥등 黨幹部學校에
中國人妻妾으로 轉落한 越北女學生들
南勞黨에 肅淸旋風


五三년 4월 남로당간부들에 대한 숙청선풍이 일어나자 당에서 쫓겨난 수백, 수천 명의 남한출신 공산주의자들은 平北 鐵山, 平南 新倉, 咸北 阿吾地 탄광 등으로 끌려가 강제 노동에 종사하는 가련한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화가 미친 것은 이들 남한출신 공산당원뿐이 아니었다. 비당원 일지라도 남한출신이면 그 화를 입어야 했고 그 여파는 六·二五당시 아무것도 모르고 의용군에 들어가 월북한 남한 출신 여학생들에게까지 미쳤다.
그 때까지 군에 있던 어린 여학생들은 강제로 제대를 당한 후 방직공 견직공 재단공 식당 및 국영상점 잡역겸 판매원으로 배치되어 노동자나 다름없게 혹사를 당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한 두 달이 못 가 노동을 감당할 수 없는 데다 굶주림에 견디다 못하여 도망쳐 나와 平壤시내를 헤매기 시작하였다. 平壤에만 이러한 여학생들이 三, 四백명은 넘었다.

그중 仁川출신 徐熙順(21)은 거리를 헤매던 끝에 형부인 尹琦燮이 납치되어 始族면에 와있다는 소식을 듣고 시골길을 더듬어 형부를 찾아왔다. 尹琦燮은 너무도 뜻밖의 일이라 깜짝 놀랐다. 여읠대로 여읜 꾀죄죄한 행색…. 그러나 그 반가움이란 이를 데 없었다.

徐熙順은 형부를 붙들고 목메어 울며 멋모르고 의용군에 들어갔던 일, 후퇴 군대 내서의 생활과 강제로 제대를 당한 후 노동하던 일 등을 말하였다.

그리고 慶北 金泉출신으로 서울 B고녀 二년 재학 중 의용군에 들어가 平壤까지 흘러온 金花子(19)는 노동판에서 탈출, 방황하던 끝에 중국음식점 점원으로 들어갔다가 타락하여 집주인인 중국인과 동거생활을 하고 있다가 비관 끝에 자살까지 했다고 말하였다. 비단 金花子뿐이 아니었다. 거의 전부가 타락한 끝에 중국음식점 주인이나 그 「보이」들과 동거생활을 하며 의식주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곧 이 사실은 삽시간에 납치인사간에 퍼져 분격한 납치인사들은 祖統에 항의하는 한편 시급한 사후대책을 세워줄 것을 건의하였다. 정치보위부에서는 당황한 나머지 극구 변명하는 동시에 平壤서 중국인과 동거하고 있는 여학생들을 조사하여 모두 공장 직공으로 보내었다.

이와 거의 때를 같이 하여 5월말쯤 始族면에 슬픈 날이 다가왔다. 오랫동안 와병 중이던 趙琓九의 병세가 위독하여졌다. 그러던 어느 날밤 그는 趙素昻, 嚴恒燮, 吳夏英등에 둘러싸여 『우리의 운명은 너무나도 허무했다. 평생을 먼지처럼 밟혀왔고 끝내는 밟혀 죽게 되었으니 말이다. 참으로 괘씸하기 짝이 없는 일이로다.』이렇게 띄엄띄엄 말을 이어가다 영 눈을 감고 말았다. 사실을 말하자면 趙琓九는 괴뢰부수상인 洪命熹의 고모부였다. 그러나 원래 성격이 대쪽같은 趙琓九는 그들에게 그렇게 많이 이용당하지는 않았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洪命熹를 필두로 洪增植, 金元鳳, 李克魯, 鄭魯湜 등이 달려가 장위위원회를 조직 三일장을 지내었다. 장사 날에는 祖統산하 각처에서 수많은 조화가 보내졌고 조위금을 보내는 등 형식적이나마 성대히 거행되었다. 당대표로는 崔元澤이 참가하고 洪命熹, 趙素昻, 吳夏英이 목멘 소리로 슬픈 조문을 낭독하였다.

이윽고 휴전이 성립되었다. 그 때까지 남로당 숙청관계로 구속되었던 자유도 완화되었고 자진 월북자와 납치인사들에 대한 포섭공작이 또다시 시작되었다.

그 첫 단계로 10월 金義煥 金憲植외 수명이 二년제 괴뢰당 간부학교에 입학하여 平壤시내 寺동 기숙사로 옮겨갔다. 그리고 다음해인 五四년에는 嚴恒燮, 金孝錫, 金七星 등이 추천을 받고 金若水, 姜旭中과 함께 같은 학교에 입학하였다.

이들은 이곳에서 딴 괴뢰간부들과 같이 대우를 받아가며 공부하였다. 수업 중 가장 성적이 우수하고 늘 一위를 차지하는 것은 嚴恒燮이었다. 그래서 그는 교수들로부터 칭찬이 자자했고 金七星은 항상 뒤떨어져 충고를 받곤 하였다. 이 때의 「크라스」반장은 金若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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